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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근처의 작은 마을인 오르치누오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우제페 베테데티 미켈란젤리는 법관 출신인 엄격한 인물이었지만 피아노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제자를 가르칠 정도로 음악애호가였다. 미켈란젤리는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어머니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4살 무렵에 폐렴에 걸려 피아노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켈란젤리는 4살이 되던 해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정기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5살이 되던 해 미켈란젤리는 다른 음악원 학생들과 같이 교내 음악대회에 참가하였고 이 때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어린 미켈란젤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후 잠시동안 피아노 의자 앞에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무대뒤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어린 미켈란젤리는 잠시 후 다시 무대 뒤로 되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 의자의 높이가 어린 미켈란젤리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아 의자에 올려주었다. 그때서야 미켈란젤리는 아무 표정없이 조용하고 완벽한 연주를 시작하였다.
이 일화는 그의 외골수적인 기질이 어려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훗 날 에도 미켈란젤리는 그의 연주에 열광하는 청중에게 결코 웃음을 지은 적이 없었고 다만 공손하게 인사할 뿐이였다. 그는 청중의 열광이나 박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연주에만 몰입할 뿐이였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청중의 의도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였다.
다음날 지방신문에 이 일화와 함께 어린 꼬마인 미켈란젤리가 놀라운 연주로 청중의 탄성을 자아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서 감정과 음악을 천재적 직관을 통해 청중과 소통하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후에 그는 밀라노의 음악원으로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밀라노에서 1934년 열 네 살의 나이로 피아노 연주의 디플롬을 받고 공식적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집안의 권유로 대학에서는 5년동안 의학을 전공하였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이지만 특이하게도 의학을 전공하였고, 때문에 의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외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네바 콩쿨을 우승하였던 19살 당시 그는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유명한 자동차 경주도 휩쓸었다. 바이올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정통하였다. 훗 날 미켈란젤리는 인터뷰에서 그의 피아노 소리는 바이올린에서 찾아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 피아노도 아닌 연주회용 풀 사이즈 그랜드 피아노를 분해했다 다시 조립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미켈란젤리의 놀라울만큼의 정확하고 치밀한 연주는 피아노의 물리적 속성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병약하였지만 등산과 스키 실력도 일류급이었다. 병약하여 운동을 기피하였던 미켈란젤리였지만, 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래서 산과 관련된 운동에서만큼은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후에 그는 알프스의 산사람들을 모아 합창을 지휘하며 몇몇 곡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38년 6월, 그의 나의 18살 때 미켈란젤리는 벨기에 바이올린니스트 유진 이자이를 기리기 위해서 창설된 벨기에 브뤼셀의 제 2회 이자이 콩쿠르에 참석한다.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 대회는 처음에는 바이올린니스트들만을 위한 대회였다. 첫 대회 우승자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고 에밀 길레스는 두 번째 대회부터 신설된 피아노 부분 우승자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관객열광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고작 7위에 머물렀다. 그것은 루빈스타인이 미켈란젤리에게 낮은 평점을 주었고, 심지어 이탈리아 심사자들은 그에게 0점을 주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대회를 후원하였던 당시 벨기에의 여왕 엘리자베드 여왕은 미켈란젤리의 화려한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여왕은 따로 그를 불러 궁전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어린 피아니스트의 특별한 재능을 칭찬하였다. 다이아몬드가 달린 7자 모양의 커프스 단추가 미켈란젤리에게 수여되었고 여왕은 7은 그의 행운의 숫자가 될 것 이라고 말하였고 이는 얼마지나지 않아 실현되었다. 후에도 엘리자베드 여왕과 아루투르 베네테티 미켈란젤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절친한 사이로 남게 된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제3회 브루셀 콩쿠르는 개최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립국이였던 스위스에서는 새로운 국제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7번째 연주자로 예정되어있었고, 1939년 6월 8일 미켈란젤리는 이 대회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였다. 여왕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 일까? 심사의원중 한명이였던 알프레드 코프토가 외쳤다. "새로운 리스트가 탄생하였다" 이 간결하고 영광스러운 카피와 함께 미켈란젤리는 콩쿠르의 우승자가 되었다.
코르토는 미켈란젤리에게 그의 사진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사인하였다. "아루투르 베데티 미켈란젤리 당신에게 나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전설은 시작되었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열광적인 평가를 내놓았고, 곳곳에서 연주회 요청이 빗발쳤다. 이태리의 메이저 음반사에서는 그에게 레코딩을 제의하였다. 코르토의 논평은 이런한 열광을 가능케 하였고, 평론가들 역시 미켈란젤리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곧 유럽전체가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으로 휩싸여들었고 이탈리아도 피할 수 없었다. 벨기에 왕족이였던 이탈리아의 여왕이 미켈란젤리를 병역의무를 전쟁으로부터 면제시켜주기위하여 중재에 나섰지만, 미켈란젤리는 그 민감한 시기에도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위하여 군에 지원하였다. 그가 전쟁중에 지원한 병과는 놀랍게도 공군조종사였다. 전쟁중 독일군에게 사로잡혀 포로생활까지 하였지만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였고 뒤에는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뛰어들었다. 매우 까다롭고 완벽하게 알려진 미켈란젤리였지만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2차세계대전중의 미켈란젤리의 경력은 다른 예술가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음악팬들은 이탈리아의 '제 2의 리스트'를 곧바로 기억해냈다. 1946년 전후 최초로 베를린에서 열린 콘서트, 1948년에 열린 미국에서의 콘서트 그리고 아시아 투어를 통해서 미켈란젤리는 흔들림없는 그의 위치를 구축하였다. 1949년 그는 쇼팽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열린 폴란드의 쇼팽 축제에서 '공식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하였다. 여러 면에서 그의 연주는 전후 찾아온 새로운 '현대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청중들에게 내면의 비경을 열어 보이는 '선지자'로서의 연주가상은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과장된 루바토나 악보를 깡그리 무시하는 주관적 해석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특정한 기교를 발달시켜 전반적인 테크닉의 불균형을 덮어버리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했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정확한기교, 악보의 객관적 전달이었다. "내게 갈채가 보내지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갈채는 베토벤이나 쇼팽, 드뷔시에게 보내져야 한다" 고 말하곤 했던 미켈란젤리는 이런 전후세대의 요구를 앞장서 선도해갔다.
그가 자기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열정이라기보다 일종의 의무감에 가까웠다. 그는 매일 열 시간씩 연습을 빼놓지 않았다. 병약한 체질이었던지라 오랜 연습이 근육통과 관절의 통증을 동반했지만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의 콘서트는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무대뒤에서 빠져나오듯 걸어나와 소리도 내지 않고 피아노 앞에 섰다. 인사는 절제되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청중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절제된 동작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건반을 잡아챘다. 피아니시모에서는 핀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잦은 이주 속에서도 알프스의 산들이 보이는 곳에만 거처를 정했으며, 연주여행 때문에 며칠 동안 눈쌓인 산을 보지 못하면 불안해하였다던 미켈란젤리. 그의 연주 또한 눈쌓인 산을 닮았다.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의 정밀한 기교, 오케스트라를 맞먹는 포르티시모까지 포용하는 웅장한 스케일이 그의 연주에 있었다.
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종 피아노 연주는 고된 노동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아노 연주가 팔과 어깨에 많은 통증과 무리를 유발하고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육체적 노동이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악기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루에 10시간 가량의 연습을 게을리 한적이 없었다. 그는 작품에 임할 때 우선 기교적으로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난 후에야 비로서 작품의 해석에 골몰하였다. 그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기 2일전부터는 연습을 중단하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연습에 의해서 베인 습관이 몸과 마음에 스며든체 무대에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켈란젤리의 극도로 세심한 터치는 피아노 색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나갔고 몇몇 선각자적인 피아니스트들(리히터, 굴드등...)과 함께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연주의 기교적, 음향적 한계를 향해 끓임없이 나아갔다. 그것은 정밀함, 우아함 그리고 힘을 겸비한 실현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노 예술가의 정진였다.
미켈란젤리는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열 한살 때부터 스스로 '모범적' 이라고 생각하는 연주방식을 시범해 보이는 방법으로 성인 연주가를 지도하곤 하였다. 첫 공식 교수직은 1938년 볼로냐 음악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베니스로 옮겼고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령 남티롤의 볼차노로 옮긴 그는 1959년까지 그곳에서 재임했다. 60년대 이후부터는 토리노와 루가노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그의 제자들중 마우리치오 폴리니,마르타 아르헤리치,아담 하라세비치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폴리니는 그의 인터뷰에서 미켈란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 하였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이며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연주자입니다.”
"그를 접한 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1961년에 몇 번인가 레슨을 받은 게 전부지만 그것이 내가 음악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요. 나를 가르쳐 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리는 여러 작품을 연주했지만 특히 그의 라벨, 리스트, 슈만,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아름다움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지요. 해석도 뛰어나지만 소리의 섬세함과 음색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완벽 그 자체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마도 칸텔리, 미켈란젤리, 아바도, 아카르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이탈리아계 연주자들은 공통적으로 완벽한 기교와 투명한 음색을 선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엄격하게 말하면 어떤 하나의 악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미켈란젤리와 함께 공부를 한 나로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수법은 엄밀하거나 세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모든 피아니스트는 각각 다른 육체적 조건을 갖고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더욱 다르다. 그러므로 근육의 훈련은 제각기 맞는 방법으로 해야지 강요할 수 없다. 보편적이고 특별한 테크닉 연마법이란 없다." 고 말했다. 테크닉 뿐만 아니라 해석에서도 그랬다. "나는 내 무늬로 학생들이 태피스트리를 짜게 하고 싶지 않다. 복사판(카본 카피)을 만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때론 그의 가르침은 추상적인 설교를 연상시켰다. "음색에 대해 생각할때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를 상상하는 것이 좋다. 내 경우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 소리가 섞인 소리 같다고 할 수 있다. 페달은 호흡을 지탱해주는 나의 폐와 같다" 라는 등.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가 열정적이고 주의깊으며 잘 준비된 교사라고 회상했다. 그는 연주회를 통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제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60여명의 제자들에게는 경제적 후원까지 뒷받침하였다. 그의 레슨과 강좌는 언제나 무료였다. 음악은 그것을 누릴 가치가있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원칙이였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리는 1943년 9월 20일 어린 시절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만난 그의 제자 줄리아나 귀데띠와 결혼을 하였다. 그녀 역시 조용한 삶을 살았으며 남편과 같이 공개 석상에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결혼 것조차 모르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그를 독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의 아내는 그의 조언자이자 연주회와 일시를 계획하는 매니저였고 그외 경제적인 일들까지 맡아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좋은 상담자이자 비서였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그의 콘서트가 많은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모습이나 행동 그리고 분위기에서 미켈란젤리는 야행성으로 분류된다. 사실 그는 밤 늦게까지 명상을 하거나 연주를 하곤하였다. 그러다 새벽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고 오후 2시경이 되어서야 연주와 레슨을 시작하였다. 미켈란젤리는 늘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시달렸고, 오랜 세월 오른쪽 팔의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애연가였던 그의 습관 때문에 폐도 많이 좋지않았다. 그는 그가 입는 옷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여름과 겨울에 입을 2벌의 옷만 소유하였다고 한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 미켈란젤리는 훌룡한 경청자였고 그의 취향에 맞지 않는 해석을 가진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코르토부터 판데레스키까지 훌룡한 동시대 연주들의 연주를 접할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다양한 20세기 피아니즘과 변천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미켈란젤리가 평소 특별히 높게 평가한 음악가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귀도 칸텔리였다.
미켈란젤리는 결코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역시 그보다 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생활의 보호를 위하여 심지어는 그들이 결혼한 사실까지 무시하고는 하였다. 인터뷰를 거듭 피하다가 결국 수락해야 할 경우 미켈란젤리는 툭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꼭 말해야 할 사실을 빼놓곤 했다. 그는 그의 선생님들이 독일인이거나 오스크리아인이였고,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부친이 '베네딕트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학자 집안이고 모친은 슬라브계라고 얘기하곤 하였지만 근거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그의 기질은 분명 이탈리아 사람의 보편적인 기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미켈란젤리가 자신의 피아노를 전세계로 가지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는 진동이나 기온변화를 겪은 뒤 세심하게 튜닝해야 하고 메커니즘이 손상되기 쉬운데다 운송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미친 짓'을 하는 연주가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리의 스타인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트럭이나 비행기에 두꺼운 천으로 둘려싸여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또한 그의 전속 조율사를 항상 동행시켰다. 어쩌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할 경우에는 악기선택에 매우 까다운 주문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일본에서의 예정된 첫날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피아노가 일본까지의 긴 여정으로 상태가 좋지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그의 여권을 압류하고 그에게 상당한 수준의 위약금을 부과하는 등 감정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그 뒤 일본에서 연주회는 물론 일본도 절대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연주회 취소 이력은 분명 악명높았다. 100%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연주를 취소했다. 병약했기 때문이게도 했지만, 그는 좋은 피아노, 쾌적한 날씨, 좋은 음향이 다 갖춰져야 만족했다. 녹음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의 화려한 연주여행에 비해 레코딩은 분명 적은 편이다. 첼리비다케처럼 레코딩에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실제 이유는 그가 완전히 '세팅'에만족해야만 녹음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녹음 과정에는 꼭 필요한 실무자만 입회해야 했으며,레코드사 고위관계자까지도 녹음실 근처에 얼쩡거릴 수 없었다. 그러나 녹음 자체는 한 두 번 연주로 쉽게 끝났다. 녹음된 연주를 체크해보긴 했지만 편집과정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음반작업 파트너였고 그가 투자를 하기도 했던 BDM사가 파산을 맞았다.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자신의 공식적인 거주지를 조국 이탈리아에서 한번도 바꿔본적이 없었지만 격노한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조국을 위하여 예술가의 지위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참전한 미켈란젤리에게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였다. 처음에는 취리히에, 그 뒤 1970년 이후에는 역시 스위스 내인 티치노에, 1979년에는 폰테 트레사 근처의 작은 마을에 정주했다. 그의 집은 이웃과는 고립되어 있었고, 이웃과의 교류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고독한 삶이였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의 개인적 면모는 '기인'에 가까웠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그의 기벽스러움은 예를 들어 글렌 굴드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굴드가 피아노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종의 '철부지 소년'의 모습으로 비쳤다면 미켈란젤리의 경우 자기와 주변에 요구하는 완벽성이 너무 지나쳐 까탈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참전까지 했던 그가 이탈리아에 보인 격노는 대단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향할 때는 단지 '이탈리아 내의 외국'인 바티칸에 가거나 다른 곳 일지라도 교황 임석하의 콘서트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름에 '축복'(Benedict)과 '천사 미카엘'(Michelangelo)를 담고 있던 그는 60년대초 재임한 교황 요한 23세의 동향 친구이기도 했고 젊은 시절 수도원에 1년간이나 생황한 적도 있었다. 요한 23세 사후에도 그와 교황청의 긴밀한 관계는 한결같았다. 1993년에는 미켈란젤리가 런던 타임즈에 사비를 들여 그의 런던에서의 예정된 4번의 모든 연주회를 취소하는 광고를 싣었다. 주최측이 이탈리아인 80여명에게 입장권을 팔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런던에서의 콘서트는 1990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다.
1988년 10월 17일 보르도의 대극장 무대위에서 드부시의 전주곡 2집중 Ondine을 연주하던 도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목숨을 잃을 뻔 하였다. 연주도중 조금 일어서서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더니 무대 뒤로 향해 가서는 부인의 품에서 쓰러졌고, 홀에 있던 심장 전문의들이 달려와 긴급처치를 통하여 간신히 그를 살려내었다. 그러나 그를 곧 회복되어 만년까지 왕성하게 콘서트 활동을 펼쳤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 1993년 5월 함부르크 무지크할레에서 열린 드뷔시 콘서트였다.
미켈란젤리는 95년 6월 12일 루가노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언에 따라 병명도, 사망시간도 발표되지 않았다. 인근의 작은 공원묘지에 그는 묻혔고 비문이나 비석은 없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죽음치고는 간소하였지만, 미켈란젤리가 평생을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검소하고 고독하게 살았던 미켈란젤리였다. 신화와 같았던 거장의 죽음을 두고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폴리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나의 슬픔은 극심합니다. 그의 예술에 대한 기억은 절대적인 방법으로 예술적인 이상에 헌신한 한 인간의 전형에 대한 기억과 함께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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